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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조상님의 기록을 정리하며 느낀 것을 글로서 남기고져 한다.
세정께서는 끊어졌던 벼슬길을 여신 분이시고, 아드님 준흠의 교육에 힘 쓰셨다.
준흠께서는 14살에 정조대왕 앞에서 시를 지으셨고 시영.희영.기영을 키우셨으며 벼슬길을 다지시고, 詩文(시문)에 능하셨다.
시영께서도 글이 뛰어나셨다. 충청도 관찰사, 한성판윤, 형조판서, 우찬성 등의 관직을 하셨으며, 특히 문형.난형을 使行(사행)시 同行(동행)시키시기도 하였으며, 후일의 집안 융성의 기반을 만드시었다.
이후 국형.문형.우형.난형은 고종 때 2품 벼슬을 하시었는데, 문형은 개화기에 일본공무국 시찰기에서 공과대학의 빠른 설립을 고종께 건의하셨다.
난형은 “이최응(대원군의 형)”이 영의정이실 때 일본국 특사 黑田과 관련하여 일본의 한국침략을 형조판서로서 지탄하다가 귀향 가신 바도 있다.
이렇게 나라의 기록으로도 남을 분이 여럿인 가계가 흔치 않을 터, 대를 이어 약 150년 동안 명가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찾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집안의 분위기가 “學文(학문)을 귀하게” 여겼고, 특히 “형제나 친족끼리 서로 이끌어주었던 家風(가풍)”이었다.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는 희영의 일기 ‘일승’이나 시영의 사행시일기 ‘유헌속록’에도 잘 나타나 있다.
후손들이 이러한 “家風(가풍)”을 繼承(계승)하여 蕃盛(번성)하기를 바라며 기록을 정리하였다.
㈜통계공족보와 함께 file로 남겨놓았다.
2016년 9월 姜敬錫(강경석) 씀
내력소개
나의 족숙(族叔)인 이 책의 편찬자는 여기 기록된 여러 어른과 가까운 후손이므로 이분들의 가족관계를 밝혀두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제가 받들어, 가지고 있는 빈약한 자료와 내 지식을 바탕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진주 강씨는 대종회가 정리한 바로는 5개 파로 대분하는데, 그중 비중이 큰 편인 박사공파에 속하여 중시조(中始祖) 계용(啓庸)의 6대손의 한 분이 회중(淮仲) 통계공(通溪公)인데, 고려 말에 이씨 조선의 벼슬 안하고 절개를 지키고자 두문(杜門)동에 숨어지낸 분의 하나이다.
그의 장남 안수(安壽) 소윤(小尹)공을 파조(派祖)로 한 소윤공파로 그 후손을 대동보에서 분류하고 있다.
소윤공의 증손(曾孫)의 한 분인 형(詗)이 연산군 때 대사관으로 재직 중 폐비 윤비와 관련된 상소로 인하여 일족이 죽음을 당하는 참변을 겪었으나 중종 때 복권되었다.
이 후손들이 대사간공파이며 별도로 종회(宗會)가 있다.
대사간공의 증손(曾孫) 중에 사상(士尚)이란 분이 선조 때 우의정을 역임하고 정정(貞靖)공의 시호를 받았다.
그러므로 대사간공파(大司諫公派)의 저명인사의 한 분이다.
그의 6대손 중에 한 분인 필득(必得)이 이 책에 기록된 분의 공통조상이라 이분부터의 가계도를 작성하여 상호 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또 이 책에 기록된 아홉 분의 행적에 대해서는 본문에 많이 수록되어 있으나 종합적인 간단한 소개를 더 한다.
1. 세정(世靖)
1743년 윤4월에 출생하여 정조 7년(1783)에 진사가 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정조 23년(1799)에 회덕현감이 되고 순조 12년(1812)에 통정첨추5위장(通政僉樞五衛將)에 임명되었다. 1818년 10월 1일에 별세하다. 호는 송담(松潭)이다.
2. 준흠(浚欽)
1768년 3월에 출생하여 정조 17년(1793)에 진사가 되어 정조에게 주목을 받는다.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후 순조 5년(1805)에 정순왕후가 별세하자 고부사 서장관으로 사행을 했다. 순조 11년(1811)에 수안군수로 부임했다. 이때 일어난 홍경래란에서 수안을 잘 지켰다. 순조 28년(1828)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30년 효명세자가 돌아가자 사직하고 아들 시영의 임지인 은율(殷栗)에 가있다가 순조 33년(1833) 정월에 별세했다. 남인이지만 공서파(功西派)에 속해 순조 때 계속 관직에 머물렀고 시문(詩文)으로 유명했으며, 유헌록2), 삼명집, 삼명시화 등 많은 저서가 있다. 호는 삼명(三溟)이다. 삼명시화1)는 근래에 번역되어 재조명을 받은 바 있다.
3. 시영(時永)
1788년 3월에 출생하여 순조9년(1809) 진사가 되고 순조 20년(1820)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순조 29년(1829)에 사은사 서장관으로 연경에 가는데 이때 여행기가 ‘유헌속록’2)이다. 그 후 純祖(순조)와 憲宗(헌종)대에는 지방과 승정원 등 조정 여러 부서의 직책을 맡았고 憲宗(헌종) 14년(1848)에 漢城判尹(한성판윤)과 刑曹判書(형조판서)를 역임하고 그 해 동지사 정사로 다시 연경을 갔다. 哲宗(철종) 4년(1853)에 大司憲(대사헌)이 되고 진하정사로 사행하는데 이 때 유헌삼록2)을 썼다. 사행시 문형.난형을 군관자제로서 동행시키셨다.
그 후 禮曹判書(예조판서), 工曹判書(공조판서)를 역임하고 高宗(고종) 1년(1864)에 吏曹判書(이조판서)를 지냈고 고종 5년(1868)에 의정부 右贊成(우찬성)으로 특임되었으나 그 해 9월에 별세했다. 호는 星沙 이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4. 희영(羲永)
1796년 5월에 준흠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여 헌종 9년(1843)에 진사가 되고 뒤에 경산 현령을 역임한다. 1867년 2월에 별세했다. 어릴 때부터 집안내력으로 시문에 밝아 1811년 아버지 임지에 가있는 동안 쓴 일지 재서일승(在西日乘)3)과 양산시고(諒山詩稿) 등의 유고가 남아있다. 호는 겸산(謙山)이다.
희영.우형 부자의 시에 대하여 디지털안산문화대전4)에 기록이 나온다.
5. 난형(蘭馨)
1813년에 출생하여 헌종 14년(1848)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철종 11년(1860)에 대사간이 되나 그 이듬해에 파직된다. 그 뒤 고종 때에 다시 기용되어 좌부승지, 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한 뒤 고종 10년(1863)에 형조판서로 임명되고 고종 22년(1875)에는 진향사로 사행한다. 그 후 고종 26년(1879)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한다. 임지에서 1881년 3월에 별세했다. 호는 해창(海蒼)이다.
6. 국형(國馨)
1838년 3월에 출생하여 철종 10년(1859)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응교까지 승진했다. 고종 8년(1871) 9월에 별세했다.
7. 문형(文馨)
1831년 10월에 출생하여 철종 4년(1853)에 백부(伯父) 성사공(星沙公) 사행 때 사신의 일원으로 수행하였다. 고종(高宗) 6년(1869)에 정시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고종 9년(1872)에 진하겸사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다시 사행했다. 고종 11년(1874)에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갔고 고종 21년(1884)에는 부승지, 고종 24년(1887)에는 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했다. 고종 18년(1881)에 조사시찰관(朝士視察團)의 조사 12명의 하나로 일본에 가서 공부성(工部省)을 4개월간 두루 살피고 돌아왔다. 고종 21년 (1895) 9월에 별세했다. 호는 난포(蘭圃)이다. ‘일본견문사건’2)과 ‘일본공무성시찰기’가 저서로 남아있다.
8. 우형(友馨)
철종(哲宗) 1853년 8월에 출생하여 고종(高宗) 11년(1874)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고종 18년(1881)에 응교로 임명되고, 광무년간(대한제국시대)에는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으로 장례원소경(掌禮院小卿) 등을 거쳐 광무 5년(1901)에는 봉상시제조(奉常寺提調) 겸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정이품(正二品)을 했다. 1906년 11월에 별세했다. 호는 소명(小溟)이다.
9. 경희(敬熙)
1858년 8월에 문형의 둘째 아들로 출생한다.
1885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삼사(三司)를 두루 거치고 대한제국 때는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으로 또 궁내부의 여러 직위를 받았다. 일제 때인 1911년 중추원(中樞院) 찬의(贊議)로 임명되었다. 1922년 2월에 별세했으며 호는 有堂이다.
위 아홉 분은 공통적으로 학문(學文)을 중시하고 시문(詩文)에 조예가 깊었다. 근세 고종 때까지 3대에 걸쳐 준흠.시영.난형.문형 4명이나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것도, 또 난형.문형이 고종께 진강(進講)한 것도 그 문장력에 대한 평가가 임명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1)강준흠 지음, 민족문화사연구소 옮김, 소명출판사, 2006년
2)유헌삼록과 유헌록, 유헌속록의 시(詩) 또 일본공무국시찰기의 일부는 2015년경, 준흠의 자손인 麟求(인구)의 한글 번역본이 발간되어 있다.
3)희영의 재서일승(在西日乘)의 일부는 2015년경 준흠.희영의 자손인 경석(敬錫)의 한글 번역본이 있다.
4)디지털안산문화재단, http://ansan.grandculture.net
2016년 8월 姜麟求(강인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