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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동소문로3길 32. '비구니' 승방 지 도 



  實驗中 청룡암의 由來 및 옛 신문기사


1.청룡암
1853-2023   (170년)
이명칭(異名稱) 미륵당(彌勒堂)
성북구 동소문로3길 32(동소문동1가 45-1)에 위치한 사찰이다. 청룡암의 원래 위치는 성북구 대사관로 3(성북동 330-115)의 삼청각이 있는 자리였고, 조선후기 세도가였던 김좌근이 철종 4년(1853)에 창건하였는데, 미륵석상이 노천에 있어서 미륵당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청룡암이 널리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에 많은 예술가들과 인연을 맺었고 그들의 작품 속에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국어학자 이윤재는 청룡암을 묘사한 기사를 남겼고, 이광수는 방을 얻어 글을 쓰곤 하였다. 또한 이태준의 소설 「딸 삼형제」에 등장하기도 하였고, 김용준과 이태준 등 성북동에 살았던 예술가들은 이곳을 자주 다녔다. 1969년 산지개발계획에 밀려 토지를 매각하고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1가 45-1 (동소문로3길 32)' 현재 위치로 도량을 옮겼다.
성북동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청룡암이라는 암자인데 현재는 전부 주택 단지로 재개발 되었다.
출처: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133쪽


2.삼청각 자리 부근에는 원래 청룡암(靑龍庵)이란 절이 있었다.
조선 철종 때영의정을 지낸 안동김문의 세도가 김좌근(金根, 1797-1869)이 1853년(철종 4)에 창건한 절이다. 1934년 8월 30일 국어학자 이윤재(李允, 1888-1943)가 『동아일보』에 발표한 글에 따르면 청룡암은 '비구니' 승방으로 당시 박묘상 (朴相相) 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3~4인의 상좌를 거느리고 절 살림을 맡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서울의 지척에 있지만 인적이 드물고 소란스럽지 않아 속세를 벗어난 별유천지의 경관이 빼어나므로 풍류를 즐기는 인사들이 왕왕 들러 놀다 가고 혹 정양차 기숙하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1934~1935년 무렵 춘원 이광수(1892-1950)가 이 절에 머물면서 『그 여자의 일생』이란 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춘원은 소설 쓰는 틈틈이 가까운 심우장에 들러 만해를 보고 가기도 여러 번이었다고. 김용준, 이태준 같은 성북동의 예술가들도 청룡암과 미륵암(현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자리)을 산책 삼아 찾고는 하였다. 8.15해방과 한국전쟁을 겪는 와중에도 꿋꿋이 법맥을 유지해 오던 청룡암은 1969년 산지개발계획에 밀려 토지를 매각하고 동소문동으로 도량을 옮겼다.
출처: 박수진 외 4인, 2015,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185-186쪽,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16


3.三仙中學校와 東小門洞事務所사이 언덕 위에는 靑龍庵(1街 45) 이 있다.
이 절은 원래 城北洞狗罇峰아래에 있었는데 政府의 山地開發計劃에 따라 절터를 매각하고 그 代金으로 1969년 5월 현 위치에 절을 세웠다. 옛 문헌에는 哲宗 때 領議政 金左根이 1853년에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옛부터 彌勒石像이 露天에 있었으므로 彌勒堂이라고도 칭했다.
출처: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69쪽


4.청룡암 靑龍庵
시대: 조선시대
소재지:서울 성북구 성북동 1가 45
삼선중학교와 동소문 동사무소 사이 언덕 위에는 청룡암이 있다. 종로구 숭인동 낙산 중턱에 있는 청룡사와 절 이름이 비슷하여 혼동이 되지만 이 절은 원래 성북동 북쪽의 구준봉(狗罇峰) 아래에 있었다. 정부의 산지 개발계획에 따라 절터를 매각하고, 그 대금으로 1969년 5월에 현 위치에 절을 세운 것이다. 조선말에 많은 시인들이 이 절을 소재로 시를 짓기도 했는데 옛 문헌에는 철종 때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철종 4년(1853)에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예부터 미륵석상(彌勒石像)이 노천에 세워져 있으므로 미륵당(彌勒堂)이라고도 칭했다.
출처: ≪성북구지≫ 1993,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181쪽


5.1853년 김좌근(金左根)이 창건한 청룡암은 현재 삼청각 자리에 있던 절이다.
절로 올라가는 길은 숲이 우거지고 산짐승이 오가는 깊은 산 속이었다. 대웅전과 요사채를 갖춘 규모 있는 절이었고, 우물에는 이끼가 끼어 운치가 있었다. 춘원 이광수는 청룡암의 방 한 칸을 빌리고, 그곳에 머물며 글을 썼다. 독립운동가인 임규(林圭)는 청룡암과 미륵당에서 친구들을 만나 풍류를 즐기던 시를 여러 편 남겼다.
출처: 송지영 외 2인, 2009, 성북동 -잊혀져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1, 20쪽


6.지금 삼청각 근처에는 청룡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동명연혁고』에 따르면 김좌근金左根,1797-1869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1920년대에는 주지 박묘상(朴妙相)비구니만 있는 절이었다. 문인과 학자들은 청룡암에서 글을 쓰거나 휴양을 하며 머물렀다. 1920~30년대 성북동 풍경을 묘사한 기사와 이태준이 1939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딸 삼형제」에 청룡암이 등장한다.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청룡암에 방을 얻고 글을 쓰곤 했다.
출처: 송지영, 심지혜, 2011, 성북동 -잊혀져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3, 18쪽


7.조선시대 말 국어학자인 이윤재李允宰, 1888-1943는 한글보급에 적극 나서며 민족운동을 했다. 어느해 수개월이나 준비했던 조선어 강습회가 취소되자 청룡암으로 길을 나선다. 이윤재는 1934년 여름, 신문에 연재한 글에서 청룡암을 일러 큰 골짜기가 깊숙하고 그윽하며, 숲과 샘이 맑아 정취가 빠지지 않고, 경도 [서울]와 가까이에 있지만 인적이 드물고 시끄럽지 않은 곳이라 하였다.
출처: 송지영, 심지혜, 2011, 성북동 -잊혀져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3, 18쪽


8.삼청동 막바지를 빠져나와, 꼬불꼬불한 산길로 하야 다 헐어지고 옛터만 남아 잇는 숙청문(북대문)에 이르러 땀을 거치고, 그 등성이를 넘어 나려다보이는 골자기로 향하야 청간을 연하야 우거진 송림사이로 나려서니, 여기가 곧 청룡암이다. ... 탑은 칠층으로 되어, 고高가 십칠 광폭幅이 사척 오촌이며, 제이층에는 연화를 새기엇고, 제삼층에는 불상을 새기엇고, 제사층에는 그속에 다보보살의 상을 간직하고, 제오층에는 헌물 및 묘상 수서의 발원문을 간직하였다. 탑의 이름을 동보탑이라 하니, 경주 불국사에 잇는 다보탑으로 가치 알아서는 안된다. 다만 거기에 다보불상을 모신 까닭으로 이름이 된 것이다.
이윤재, 「성북청룡암에서」, 1934
출처: 송지영, 심지혜, 2011, 성북동 -잊혀져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3, 19쪽


  實驗中 청룡암의 由來 및 옛 신문기사

탑에 관한.... board_1
1934.08.31 동아일보 board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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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08.29 동아일보 board_1